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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광수 교수를 죄인으로 몰아간 안경환 인권위원장 난 반대다. >

일상과 정치 2006/11/01 22:27 다운이

어제 로리타 꿈꾸고 오늘 또 이런 글을 쓰려니 아무래도 공교롭게 느껴진다. 마치 내가 매우 밝히는 것 같지 않은가 말이다. 뭐, 전혀 오해라고 주장할 생각은 없지만....

나는 안경환이 누군지 잘 몰랐다. 다만 그가 한겨레에 가끔 칼럼을 연재하는 것을 접했고 그래서 그가 꽤 괜찮은 인물이려니 했다. 나 꽤 단순하다. 그런데 오늘 그의 진면목을 보여주는 사실 하나를 알게 됐다. 이걸 설명하자면 우선 지난 세기말 아주 중요하면서도 어이없는 사건 하나를 떠올려야 한다.

[1992년 10월 29일. 연세대학교 국문학과 마광수 교수는 그의 장편소설 <즐거운 사라>가 외설이라는 이유로 전격 구속, 서울구치소에 수감되었다. 그해 12월 28일, 그는 1심에서 징역 8월에 집행유예 2년을 받았다. 다음 해 그는 직위해제 되었으며 1995년, 대법원 상고심에서 상고 기각 후 해직되고 시간강사로 남게 되었다. 질곡의 늪 속에서 모진 고통을 감내하던 1998년에 이르러서야 그는 사면복권 되고 연세대학교에 복직했다.]
--'마광수는 여전히 옳다' 오마이뉴스 기사 중- 기사보기

안경환의 진면목은 이 과정에서 그가 한 역할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는 재판부의 요청에 응해 이 사건에 감정인으로 참여했는데 그 정황은 아래 일요신문 의 기사를 참고하자.

법원은 민용태(고려대 교수), 하일지(작가) 두 사람에게 감정을 시켰는데, [… 사라]에는 음란성이 없다는 취지의 공동의견이 나왔다. 법정에서는 검찰측 신청의 감정인 민용태 교수와 담당 검사가 언성을 높이며 설전을 벌이는 진풍경도 벌어졌다.

검찰이 신청한 감정인조차도 피고인에게 유리한 감정의견을 냈기 때문에 항소심에서는 무죄판결이 나리라는 전망이 유력해졌다. 그러자 재판부는 이상하게도 검사의 요구를 받아들이는 형식으로 서울법대의 안경환 교수를 새로운 감정인으로 선정했고, 안 교수는 [… 사라]가 문학작품의 수준에 이르지 못하는 ‘단순한 음란물’이라는 감정의견을 내놓았다. 천만 뜻밖이었다.

안경환은 이 감정서에서 즐거운 사라를 < 이 작품은 학문과 예술의 자유를 보장한 헌법이 보호해야 할 정도의 문학적 가치가 없는 법적 폐기물에 불과하다> 라고 혹평 했는데 이러한 견해는 재판에 그대로 반영되었다.
아래는 마광수가 대법원에 제출한 상고이유보충서 중 안경환의 감정견해에 대한 반박이다.

[안경환 감정인의 감정견해는 이 건 소설이 성범죄를 유발시킬 위험은 없다고 감정한 것 이외에는 대체로 이태동 감정인의 감정견해와 유사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안경환 감정인이 문학인이 아닌 법학자로서 감정의뢰를 받았다고 볼때, 그의 진술에는 진술 자체에 여러 모순점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우선 그는 "문학작품의 음란성을 법의 잣대로 판단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아니하며", "예술작품에 대한 평가를 법이라는 당대의 다수가 신봉하는 보편적인 기준을 적용하여 평가하는 것은 장래를 향한 문학적 발전을 위축시키는 결과가 초래되기 십상입니다.
그러므로 예술작품의 평가는 법보다는 개개 국민에 위임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것이 저의 소신입니다"라고 진술하여 현재의 법으로 문학작품을 평가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음을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결국 '불쾌감'을 준다는 이유로 이 건 소설을 단죄하는 것을 정당화하는 듯인 인상을 주는 결론을 이끌어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또 "피고인 마광수의 구속이 불법이거나 또는 심히 형평에 맞지 않았다는 사실 또한 감정의 내용과는 무관한 것이므로 고려의 대상에 넣지 않았습니다. 피고인 마광수의 구속이 도주 또는 증거인멸의 우려가 없는 상태에서, 그것도 학기 중에 이루어졌다는 사실은 비난받아 마땅하지만 이에 대한 판단과 구제는 재판부의 소관이므로 언급을 회피하였습니다."라고 진술하여 공정하고 객관적인 것 같은 인상을 주려고 하고 있지만, 이 건 소설을 감정한 것 자체가 제가 구속되어 재판을 받는 과정의 한 절차로서 이루어진 것이라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습니다.
안경환 감정인이 감정인의 자격으로서가 아니라 한 문학애호가로서 독후감을 발표하는 형식으로 감정서를 썼다면 별 문제가 될 것이 없고, 얼마든지 혹독하게 이 건 소설을 비난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가 '처벌' 여부가 좌우되는 감정을 하면서 이렇듯 모순된 논리로 감정에 임했다는 것이 저로서는 납득할 수 없는 것입니다.
만약 안경환 감정인이 이 건 소설을 감정하게 된 과정 자체를 정당하게 보지 않았다면 감정 자체를 거절했어야 하는 것이 '우리 사회에 있어서의 통상적인 성인'의 생각일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는 이 건 소설의 주제가 '성의 해방과 인간의 자아문제'라고 진술하면서도, 감정서 말미에 이 건 소설이 '통속성'을 극복하지 못했기 때문에 단순한 음란물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견'을 덧붙이고 있습니다. 이는 결국 양비론적 시각이라고도 볼 수 있고, 아울러 전위적 현대문학보다 관념적 고전에 집착하는 보수적 문학애호가들이 흔히 갖고 있는 문학적 숭고미에 대한 경건주의적 편견에 기인한 것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만, 어쨌든 수미일관된 논리를 바탕으로 해야 할 법학자의 감정 견해로는 수긍하기 어려운 면이 많습니다. 통속성을 극복하지 못했다고 해서 작자가 처벌받아야 한다는 것은 일반인의 법적 상식으로도 받아들이기 곤란한 견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안경환 감정인의 감정서는 법학자의 입장과 한 독자로서의 입장이 혼재된 것이기 때문에, 만약에 법학자로서의 안경환 교수에게 감정을 의뢰한 것이라면 '문학작품에 대한 법적 판단'에 대한 그의 견해만을 수용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봅니다. 특히 안경환 감정인이 이 건 소설의 절반 이상이 성행위 묘사에 배정되고 있다고 감정한 것은 검찰의 공소장에 기재된 성행위 묘사부분의 분량을 고려할 때(전체의 2퍼센트 정도입니다) 도저히 객관적으로 이해되기 어려운 부분입니다. 성적 담론(談論)이 약간씩 들어가 있는 부분까지를 모두 '성행위 묘사'로 착각하고 있는 것 같아, 더욱더 그가 '문학적 경건주의에 몰입해 있는 보수적 문학애호가'라는 생각을 갖게 만드는 것입니다.
법학자로서의 안경환 감정인이 감정서에 진술한 대목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이 소설이 독자에게 성적 충동적 모방심을 자극시키고 성범죄를 유발하는 등 사회적 현실로서 위험을 가져올 위험은 없다"고 진술한 '감정사항 6'에 대한 답변일 것이고, 덧붙여 '감정의 전제조건 1항'에 씌어있는 내용일 것입니다. 거기에는 다음과 같이 기술되어 있습니다.
「문화적으로 성숙한 사회에서는 성인독자를 상대로 하는 어문 저작물을 반사회성 또는 반윤리성을 문제삼아 이에 대해 형식적 제재를 가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저는 믿습니다. 출판물에 의한 명예훼손의 경우와 같이 피해자가 특정한 개인이 아니고 '선량한 사회풍속'을 존중하는 불특정다수의 국민인 경우에는 개개 국민에게 작품에 대한 판단과 선택을 맡기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말이다. 말로만, 글로만 맨날 표현의 자유가 중요하니 어쩌니 하면 뭐하나? 결국 마광수를 뽀르노 소설가로 몰아서 매장시키지 않았는가 말이다.
그리고 솔직히 법하고 인권하고 궁합이 맞나? 난 영 아니올시다인데... 법이란 게 그 시대 주류의 의식을 반영하기 마련이고 인권이란 대개 소수의 권리옹호로 구현되는데 말이다.

Posted by 광마
< 왜 나는 순수한 민주주의에 몰두하지 못할까 > / 마광수


노예들을 방석 대신으로 깔고 앉는
옛 모로코의 왕이 나오는 영화를 보고 돌아온 날 밤
나는 잠을 못 잤다 노예들의 불쌍한 모습에 동정이 가다가도
사람을 깔고 앉는다는 야릇한 쾌감으로 나는 흥분이 되었다
내겐 유일한 자유, 징그러운 자유인
죽음 같은 성욕이 나를 짖눌렀다.
노예들이 겪어야 하는 원인 모를 고통에 분노하는 척 해보다가도
은근히 왕이 되고 싶어하는 나 자신에 화가 치밀었다.
그러나 역시 내 눈 앞에는 왕의 화려한 하렘과
교태 부리는 요염한 시녀들의 모습이 어른거린다.
이 얄미운 욕정을 가라앉히기 위해서 나는
온갖 비참한 사람들을 상상해 본다.
굶어 죽어가는 어린아이의 쾡한 눈
쓰레기 통을 뒤지는 거지 할머니,
그런데도 통 마음이 가라앉질 않는다.
왕의 게슴츠레한 눈과
피둥피둥 살찐 쾌락들이 머릿속에 떠올라
오히려 비참과 환락의 대조가 나를 더 흥분시킨다.
아무리 애써 보아도 그 흥분은 지워지지 않아
나는 그만 신경질적으로 수음을 했다.
왜 나는 순수한 민주주의에 몰두하지 못할까

다음날에도 나는 다시 극장엘 갔다.
나의 쾌감을 분석해보기 위해서, 지성적으로.
한데도 역시 왕은 부럽다 벌거벗은 여인들은 섹시하다.
노예들을 불쌍히 생각해줄 여유가 나에게는 없다
그 동경 때문에 쾌감 때문에.
그러나 왕을 부러워하는 나는 지성인이기 때문에 창피하다.
양심을, 윤리를, 평등을, 자유를
부르짖는 지성인이기 때문에 창피하다.
노예의 그 비참한 모습들이
무슨 이유로 내게 이상한 쾌감을 가져다 주는 걸까
왜 내가 평민인 것이 서글퍼지는 걸까
왜 나도 한번 그런 왕이 되고 싶어지는 걸까
아니 그럭저럭 적당히 출세라도 해서
불쌍한 거지들을 게슴츠레한 눈으로
바라보고 싶어지는 걸까
왜 나는 순수한 민주주의자가 되지 못할까
왜 진짜 민주주의에 몰두하지 못할까 

(시집 <가자, 장미여관으로> 에서)

Posted by 광마

마광수 소설집《발랄한 라라》를 읽고 .............. 최다예


나는 이 책을 샀다. 생각과는 다르게 표지도 책 이름처럼 발랄해서였는지 앞뒤로 붙은 빨간 19세미만 구독불가 딱지 때문에 오히려 더 반발심이 들어서였는지도 모르겠지만 수업 주교재인 '카타르시스란 무엇인가?'보다 훨씬 기분 좋은 마음으로 책을 구입했다. 사실 내가 흥미롭게 듣고 있는 수업의 교수님이 쓴 소위 '야한 소설'은 도대체 어떤 것일까 궁금한 마음이 매우 컸다. 사실 마광수 교수님의 다른 책은 수업 주교재인 '카타르시스란 무엇인가'를 제외하고는 한 권도 제대로 읽지 못했지만, 사회적인 전반적인 도덕적 윤리의식에 반한다고 해서 배척당하고 멀리해야하는 대상으로 간주되는 것이 마음 한편으로 측은지심도 들고 도대체 마광수는 어떤 사람이고 그가 쓴 책과 그가 말하는 사상은 어떤 것이기에 이리도 세상에 반하는 것으로 낙인이 찍혀야 하는 것인가 궁금했다. 사실 그래서 여학생이라면 어려워할 법한 마 교수님의 수업을 듣기로 작정하기도 했다.

책을 읽으면서 정확하게 느낀 것이 있다면 저자는 참으로 섹스관이 뚜렷하구나. 이것이다. 가볍게 쓴 필체이지만 은은하게 스며든 로맨스라던가 (본론에 의하면 ‘거지같이’) 감질 나는 것보다는 (현재의 한국의 통념적인 정서 상) 변태적으로 보일만한  긴 손톱과 굽 높은 하이힐, 스판덱스 소재의 아찔한 옷에 온몸에 피어싱을 한 금발 미녀와의 노출층적 쾌감을 느끼며 추는 춤과 섹스, 그리고 소설 군데군데 나타난 성적 행위들이 (모르긴 몰라도) 저자의 성적 판타지임을 책 전반에서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실제 섹스 행위의 묘사보다 여주인공 라라와 사라의 모습의 실감나는 묘사 표현에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 또 실제 대학가에서 일어나고 있거나 대학생들이 느낄 법한 연애 이야기로부터 연장된 소설을 읽으며 주위에서 일어나는 일에도 날카로운 시선을 가지고 있는 창작자의 시선을 조금이나마 알 수 있었다.

내귀에도청장치 라는 이름을 가진 밴드가 있다. 그들의 무대의상은 화려 그 자체이다. 보컬은 남자이지만 그가 입는 옷은 여성의 옷이다. 번쩍번쩍 빛나는 소재의 치마에 빨간 스타킹을 입고 붉은 꽃의 형상을 한 코사지를 머리에 쓰고 짙은 화장을 하고 온몸은 치렁치렁한 보석으로 치장을 한 모습이다. 노래를 부를 때의 모습도 목소리만 남자이지 여자와 다름없는 몸짓이다. 무대 뒤쪽에는 메이드복장을 한 코러스가 요염하게 춤을 추고 있다. 처음에는 거부감이 들게 마련이다. 보통 밴드와는 확연히 다른 차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점점 그들의 공연을 보면 볼수록 그들의 퍼포먼스와 연주에 빠져들게 된다. 어느새 그들의 공연에서 복장과 퍼포먼스는 빠져서는 안 되는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마광수의 소설도 그렇다. 처음 접했을 때에는 거부감이 들 수 있지만 에로티시즘은 그의 문학에서 빠져서는 안 될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저자가 자신의 평생의 문학 대부분을 성을 주제로, 허위와 이중적 위선으로 가득 찬 교훈주의에서 벗어나 지금의 자유로운 창작을 하기까지 얼마나 험난한 여정을 했을 지 짐작이 되었다. 또 많은 사람들의 눈초리를 받으면서도 끝까지 자신의 원하는 문학을 펼쳐나간 그의 뚝심에 또 한 번 놀랐다. 하지만 나는 묘한 연민이 드는 부분이 있었다. ‘판타지’라는 게 본디 이루어 질 수없는 것이 아닌가. 특히 ‘자궁 속으로’에서 주인공을 실제 인물과 동일시하여 생각하다보니 현존하는 인물 마광수의 현실과의 기나긴 싸움, 그 여정이 판타지로서 끝나야 하는 것이 안타까웠다. 소설 속 마광수는 자신의 상상 속의 인물과 원하는 모든 것을 다 행해보고 원하는 사랑과 사회적 인정을 받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음에 소설에서 나와 얼마나 허탈함을 느꼈을까. 소설 속에서나마 상상의 나래를 펼칠 수 있음에 감사할 수도 있겠지만 내가 마광수였다면 현실과의 괴리감에 힘들어 했을 것 같다.
 
책에 실린 여러 작품들 중에 정말 기발하고 생각할 여지를 남겨둔 정말 괜찮은 작품이라고 생각한 것이 있는가 하면 단순히 소위 말하는 '야설'에 나오는 섹스 행위 묘사에 그친 작품도 있었다. 하지만 이 같은 것들의 경우도 퇴폐사상과 쾌락의 중요성, 대리배설의 치료 효과 등을 생각하면 오히려 칭찬해야 하는, 깊은 뜻이 숨어있는(!) 수작인 것이다. 나도 어느새 저자의 논리와 사상에 물들어 버린 것일 지도 모른다. 평소의 나였더라면 쳐다보지도 않았을 텐데 지금은 포장하지 않은 사람의 있는 그대로의 욕구를 표현한 새로운 장르의 문학이라고 생각하고 거부감은커녕 오히려 허례허식이 없는 정직한 문학이라고 생각한다.

Posted by 광마

내숭과 가식, 이제는 허울을 벗어야 할 때 / 오우정
- <발랄한 라라>를 읽고 나서 -


다양한 가치관들은 그 다양성 자체를 인정해주어야 한다. 이런 말들을 대학에서는 너무나 많이 들어왔다. 대학 이전의 학창시절에서는 잘 다루어지지 않는 문제들인 동성애자나 양성애자등 성적 취향에 대한 문제들도 많이 접하게 되며 그것이 설사 본인의 가치관과 다를 지라도 인정하고 받아들여 주어야 한다는 것이 요점이었다. 대학에 오니 그전과는 다르게 뭔가 개방적인 분위기가 되려는 낌새가 보이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정작 직접적으로 성에 대해 언급하는 것은 회피하는 분위기였다. 개방을 가장한 은폐라는 생각이 든다. 아직도 보수적이기만 하고 안 좋게 말해서 내숭을 떨고 있는 이런 한국사회에서 성에 대한 내용을 직접적으로 쿡 찌르는 것은 많은 용기가 필요한 일로 치부되고 있다. 나는 이런 점들이 맘에 들지 않는다.

<발랄한 라라>는 개방성이나 성 취향의 다양성 같은 문제에 대해 내가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양성애자나 동성애자는 당연한 걸로 권익을 보호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왜 다른 성적취향 - 사디즘이나 마조히즘 등 - 은 변태성욕이라고 비하하면서 쉬쉬하는 걸까. 이것도 다 가식이다. 오히려 사디즘 마조히즘 관련 물품에 대해서는 그렇게 표면적으로는 많은 비난을 하면서도 은밀하게 죄다 팔려나가고 있으며 심지어 일본에 가서 공수해 오는 사람도 있다. 왜 자신이 원하는 것을 떳떳하게 말하지 못할까. 남들에겐 모두 숨기다가 자신의 숨겨진 욕구를 들키는 것이 더 부끄러운 일 아닌가? 또한 자신의 욕구가 떳떳하지 못하다고 겉으로 생각하는 것은 자신의 그런 생각을 죄스럽게 치부하기 때문에 생기는 일이다.

다른 다양성들은 다 인정하면서도 개방된 성문화에 대해서만은 이렇게 가식과 내숭을 떨다니 말이 안 되는 사실이다. 겉으로 숨길수록 속은 더 곪아간다는 것을 정말 모르는 것일까. 이런 점에서 소설 속의 주인공들은 매우 솔직하고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개방된 성생활이 정도를 지나쳐 성범죄로 가는 것은 절대 일어나서는 안 될 일이다. 하지만 이것은 개방이 진정한 개방이 아닐 때 발생하는 일이다. 진정으로 개방을 했다면 자유로운 성생활이 당연시 될 것이고, 오히려 속으로 곪아버리는 문제 - 은폐된 성문화에 의해 일어나는 성범죄 등 - 는 사라질 것이다.


60,70년대 히피문화가 들어오면서 프리섹스 운동이 일어나는 등 많은 변화가 있었다. 물론 이것은 우리나라의 예보다는 가까이 있는 나라, 일본의 예시이다. 일본은 성적으로 개방적인 나라이다. 기존의 문화도 성문화에 대해 쉬쉬하는 우리나라보다 훨씬 개방적이었겠지만 그런 문화의 개입 또한 있었기에 더욱 개방적으로 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마 교수님의 소설은 발간이 되면서 말이 많아진다. 앞에선 그런 태도를 취하며 뒤돌아서서는 다들 읽어보며 재밌어할 것이면서. 나는 원체 가식과 내숭을 싫어하지만 다른 문제에서는 모두 털털한 척 하면서도 이런 문제에 대해서는 더욱 가식과 내숭을 떠는 문화는 분명히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인터넷으로 야동도 실컷 다운받아 보는 사람들이 야설이 정식으로 발간되는 것에 대해서는 그렇게 호들갑을 떨다니 이해할 수 없다. 개인적으로 발랄한 라라는 그 유려한 문체도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지만 소설 중간 중간에 같이 있는 삽화도 책 속의 또 다른 예술이라고 생각한다.

마 교수님이 그림에까지 능통하신 줄은 미처 몰랐다. 전문 화가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예술성이 뛰어나 보이는 그림들이었다. 붓으로 그리신 것인지 터치가 아주 뛰어나 보였다. 때론 직접적이기 보다 어떤 것들을 형상화시켜 추상화처럼 그려진 그림들도 있었는데 난해하면서도 유명한 추상 화가들의 작품을 보는 느낌도 있었다. 책의 표지도 ‘발랄한 라라’ 라는 제목에 걸맞게 발랄한 느낌이 들었다. 무엇보다 섹시하고 정렬적인 느낌이 들면서도 발랄하고 명쾌한 느낌을 주는 빨간색이 전체적인 구성을 이루고 있다는 점이 아주 마음에 들었다. 성의 개방성과 책 속의 주인공들의 솔직함을 통해 카타르시스를 맛볼 수 있었던, 더불어 표지와 삽화까지 예술적인 발랄한 라라. 오랜만에 나에게 신선한 느낌을 주는 도서를 하나 읽어본 것 같아 만족스럽다.
Posted by 광마

깨달음이 육체적 고통으로부터 온다는 것은 환상이다 ........ 마광수


 소승불교의 일파에서는 극단적인 고행, 이를테면 분신자살(불교용어로는 소신공양(燒身供養)) 등을 통해서 자신을 해탈로 이끌려고 한다. 그러나 죽어 없어져버린다는 것은 다만 육체적 고통을 ‘도피’하는 것에 불과한 것이지 마음과 몸의 고통을 함께 극복하여 신심불이(身心不二), 즉 중도적(中道的) 입장에서 영원한 쾌락에 이르는 길은 되지 못한다. 그래서 나는 김동리의 단편소설 ‘등신불(等身佛)’이 고교 국어교과서에 오랫동안 수록돼 있었던 것이 진심으로 불만이었다. 소신공양의 공덕을 예찬하고 있는 이 소설은, 자살을 터무니없이 미화시키고 있어 청소년들을 자살충동에 빠뜨릴 위험마저 있다. 

 육체적 고행은 자아로 하여금 육체의 세계 즉, 색계(色界)를 초월시키는 작용을 하기
는 한다. 그러나 고행이 유일한 구제책은 아니다. 고행이란 깨달음을 향한 최초의 동기를 부여하는 작용만을 한다. 그러므로 고행주의적인 소승불교는 불교의 진수가 되지 못한다. 

 석가 역시 출가 후 처음에는 그때 유행하던 고행주의를 좇아 미칠 듯이 몸을 학대하며 깨달음의 순간이 오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몸을 학대해봤자 (이를테면 단식 같은 것으로) 찾아오는 것은 생명력의 소진(消盡)뿐이었다. 석가가 기아에 못 이겨 인사불성 상태가 되자 지나가던 여인이 우유죽을 입에 흘려넣어 석가를 소생시킨다. 그때 석가가 깨달은 것이 바로 ‘중도(中道)의 진리’다. 즉, 몸(身) 역시 정신(心) 못지 않게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그때부터 석가는 기존의 힌두교적 고행주의를 버리고 스스로 독창적인 수행을 쌓아나가게 된다. 

정신적 쾌락(즉 깨달음)은 육체적 고통으로부터 온다는 생각은 환상에 불과한 것이기 때문에 공연히 육체를 괴롭게 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내’가 잘되기 위해서는 ‘남’이
괴로워야만 한다는 상대적 고정관념이 우리들 마음속 깊이 뿌리박혀 있기 때문에, 우리는 가학적 고통을 스스로 유도해내고 있다. 하지만 나도 즐겁고 남도 즐거울 수 있는 방법이 있을 수 있다. 마찬가지로 육체도 즐겁고 정신도 즐거울 수 있는 방법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것이다. 

석가의 이러한 가르침은 영화관의 스크린과 영사기의 관계로 비유될 수 있다. 영사기
의 광원(光源)에서는 센 빛이 투사되는데 그 앞에 걸려 있는 필름이 컴컴하면 스크린엔 어둡고 음침한 정경이 비춰지듯이, 우리의 본성은 원래 빛 그 자체인데도 우리 마음의 필름에 입혀져 있는 어두운 그림자들 때문에 현상의 세계에는 고통만이 나타나는 것이다. 

‘육체는 더럽다’는 인식을 버릴 때 마음의 필름은 맑고 투명하게 되어, 현상세계 (즉 스크린)는 심신 모두 기쁨과 쾌락으로 충만하게 된다. 불가에서 ‘광명편조(光明遍照, 빛은 두루 비친다)’라는 말을 자주 쓰는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다.

  이렇듯 석가 개인뿐만 아니라 우리 모든 인간이 다 부처요, 고행 역시 구도를 위한
궁극의 길은 아니라는 것이 이미 원시 불교의 중도(中道)사상에 의해 분명히 규명되
었건만, 아직도 석가모니를 저 하늘나라 극락세계에서 신통력을 부리며 중생을 굽어
보고 있는 절대신(絶對神) 정도로 생각하는 기복신앙적인 불교가 성행하고 있다는 것은 슬픈 일이다. 또한 육체를 학대하면 할수록 도력(道力) 높은 고승이라는 믿음이 일반적으로 유포돼 있다는 것 역시 진실로 안타까운 일이다.

  1993년에 성철(性徹)스님이 타계했을 때, 7년 동안이나 눕지 않고 앉아서 버텼다느니, 이쑤시개 하나로 몇 년을 썼다느니 하는 등 육체적 본성을 억누른 실적만 들입다 강조되었다. 이쑤시개를 그토록 아껴야 한다면 이쑤시개를 만들어 팔아 연명하는 중생들은 그럼 굶어죽으라는 얘기인가. 성철스님의 인생관이나 우주관에 대한 이해나 설명은 거의 없이 그분이 벌인 ‘육체와의 전쟁’만이 선정적으로 보도됐다는 것은, 우리나라 불교계의 허약함과 한국 매스컴의 경박스러움을 단적으로 보여준 사건이 아닐 수 없다. 화장 후 사리가 몇 개 나왔느니 하며 법석을 떤 것 또한 보기 좋은 풍경이 아니었다. 

 불교의 원리대로라면 석가모니는 지금 이 우주 어느 곳에도 없다. 3차원 세계뿐만 아니라 4차원, 5차원 세계에도 없다. 그는 인류 최초로 윤회의 고통에서 벗어난 각자(覺者 )이기 때문이다. 그는 보통 사람들처럼 ‘죽어도 죽지 않는’ 윤회의 악순환 속에 다시금 빠져든 것이 아니라 진짜로 ‘죽어버린’ 것이다. 그러니 그에게 죽어라 기도한들 무슨 응답이 있겠는가. 예전에 어느 고승이 신도들이 영험 있는 부처님이라고 애지중지하는 목불(木佛)을 겨울밤에 춥다고 장작으로 뽀개 썼다는 일화는 이러한 진리를 아주 멋지게 은유해주고 있다.

  고행 역시 마찬가지다. 물론 적당한 절제는 덕이 된다. 그러나 ‘회신멸지(灰身滅智,
몸을 태워 지혜를 멸함)’에까지 이른다면 그것은 정신분열적 자기학대가 될 뿐이다.
서양 중세기 암흑시대에 덜 떨어진 수도사들은 자기의 성기를 거세해가면서까지 욕망을 끊어버리려고 애썼는데, 불교의 승려들 가운데도 그런 이들이 더러 있었다. 이는 ‘신심불이(身心不二)’를 근간으로 하는 중도(中道)의 원리를 미처 체득하지 못한 데서 기인한 서글픈 해프닝이었다.

(철학에세이 <비켜라 운명아, 내가 간다> 에서)
Posted by 광마

글쓴이: gardener84[이선우](연세인) 마광수 교수님의 사건에 대한 이야기는 건너건너 슬쩍 들었었는데 이렇게 게시판이 달아오를 정도로 커질지는 몰랐네요. 이 게시판에 글.....

존경하는 ooo 안녕하십니까? 저는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거주하는 동포 ooo입니다. 매스컴을 통해 마광수 교수님의 2008년 강의가 폐쇄됐다는 소식을 접하고 이렇게 먼 곳에서.....

[문화저널 21] 마광수의 최근 인터뷰 동영상 Part I

<문화저널 21>에서 이번 연세대학교 강의 폐쇄와 관련 인터뷰를 했다. <강의 전면 폐쇄, 이어지는 불운 마광수 교수, 제2의 시련기?> 에서 마광수 교수는 자신이 처한 현재.....

[Why] “도작(盜作)에 대해선 할 말 없지만… ” [왜 그는] 강의 배정 못받은 마광수 교수 “야한 글 안된다고 생각 안해” 이인묵 기자 redsox@chosun.com (.....

내가 세상에 남기고 싶은 말 나는 처세에 둔감하였다. 아니, 신경쓰지 않았다. 그래도 언제나 고난의 끝은 '나'의 승리였다. 항상 홀로 있는 연습을 하라. 스스로 홀로 되어 의.....

[단독]마광수 탄원서 ″교수들이 내게 집단 린치″ [2007.12.14 18:01](국민일보) [쿠키 사회] 연세대 국문과 마광수 교수가 “교수들이 내게 집단 린치를 가했다”는.....

2007년 12월 14일 (금) 10:29 일요신문 [마광수 교수] 연세대 강의 폐쇄 방침에 탄원 갖은 우여곡절 끝에 대학 강단에 복귀했던 마광수 연세대 교수(국문학과)가 또.....

김지하와 마광수 --- 시대가 두려워한 작가

시대가 두려워한 작가 --- 김지하와 마광수 금서(禁書). 우리나라의 금서는 대체적으로 사상적ㆍ정치적 문제들에 의한 이유나 국민의 정서에 맞지 않는 음란성의 이유로 규정지어 진다. 각종 이유로 판금 조치된 여러 서적과 작가들이..

[인터뷰] 마광수 교수의 대담한 매력?

< 마광수 교수의 대담한 매력? > 인간 '마광수'를 만나다 2007년 03월 17일 (토) 13:02:20 안재욱 기자nowstart@yonsei.ac.kr (연세대학교 학보) # 마광수는 변태소설가라고?! 그를 어떻게 알고..

상수도만 있고 하수도가 없다면 .............. 마광수

[마광수의 馬Q정전] '상수도'만 있고 '하수도'가 없다면 / 마광수 연세대 교수 입력 : 2009.06.19 16:34 깨진 그릇이 오래간다 음양조화 이룰 때 건강 적당한 퇴폐 인정해야 우리 속담에 "깨진 그릇이 오래간다"..

마광수 시집 [야하디 얄라숑]의 음란성 시비

<또다시 음란성 시비에 휘말린 마광수 교수> (2006) 시집 <야하디 얄라숑> 근친상간, 동성애, 양성애 주제로 삼아 김용삼 마광수 교수의 신작시집 <야하디 얄라숑> 어서 저의 보지를 잡수셔요/저는 당신의 자지를 먹겠어요/자..

관음증에 대하여 ............... 마광수

관음증(觀淫症)에 대하여 ............ 마광수 관음증은 도시증(盜視症) , 엿보기, 응시하기 등의 다양한 명칭으로 불리는 성적 도착(倒錯)의 일종이지만, 이제는 변태성욕이라고 보기에는 너무나 여러 방면에 걸쳐 갖가지..

담배와 나 ................ 마광수

담배와 나..............마광수 내가 담배를 피우기 시작한 것은 대학을 졸업하고 나서도 한 이 삼 년 뒤의 일이다. 친구들 가운데는 고등학교 때부터 담배에 인이 박힌 이들이 많았는데, 나는 소심한 모범생이었기 때문인지..

씨, 선생님, 교수님, 강사님 ............... 마광수

씨, 선생님, 교수님, 강사님 ...........마광수 호칭문제는 우리나라같이 경어법이 극도로 발달한 언어를 갖고 있는 나라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중요하면서도 골치아픈 문제이다. 나는 1992년의 <즐거운 사라'> 필화사..

육체에 집착하지 말라고? ..................... 마광수

육체에 집착하지 말라고? ........... 마광수 이름은 날린 사람들중에는 성적 콤플렉스가 그 사람을 입신(立身)케 한 원동력으로 작용한 경우가 많다. 가장 대표적인 사람이 바로 히틀러이다. 오스트리아의 시골마을에서 태어난..

마광수 소설집 [발랄한 라라]를 읽고 / 오우정

내숭과 가식, 이제는 허울을 벗어야 할 때 / 오우정 - <발랄한 라라>를 읽고 나서 - 다양한 가치관들은 그 다양성 자체를 인정해주어야 한다. 이런 말들을 대학에서는 너무나 많이 들어왔다. 대학 이전의 학창시절에서는 잘 다루..

깨달음이 육체적 고통으로부터 온다는 것은 환상 ........... 마광수

깨달음이 육체적 고통으로부터 온다는 것은 환상이다 ........ 마광수 소승불교의 일파에서는 극단적인 고행, 이를테면 분신자살(불교용어로는 소신공양(燒身供養)) 등을 통해서 자신을 해탈로 이끌려고 한다. 그러나 죽어 없어져버..

마광수 소설집 [발랄한 라라]를 읽고

마광수 소설집 <발랄한 라라> 감상문 ........... 최현제 마교수님께서는 강의 중에 “소설은 역시 장편이어야 한다는 편견이 팽배해있는데, 소설은 역시 짧은 것, 그중에서도 아주 짧은 것이 소설의 진수를 담고 있다고 생각..

인생의 4 고(苦) ............... 마광수

인생의 4 고(苦) .......... 마광수 나에게 석가모니식으로 인생의 4고(四苦)를 꼽아보라고 한다면, 나는 병고(病苦)를 첫째로 꼽고, 그 다음으로 옥고(獄苦)를 꼽겠다. 옥고 다음에 크나큰 고통으로 다가오는 것은 파산..